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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43. <부정공>석재공휘동선묘갈명(石齋公諱東璿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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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부정공>근와공휘동연묘갈명(槿窩公諱東璉墓碣銘)
槿窩公諱東璉墓碣銘 公姓趙諱東璉 字仲器號槿窩 玉川人 高麗光祿大大諱璋之後 有諱元吉 以策勳封玉川府院君 是爲受貫之祖 生諱瑜官至副正 及社屋罔僕于我入杜門洞 有諱大成 號梅牎官勵節校尉贈佐郎 享武曲祠 曾祖諱昌灌 祖諱章燮號韋堂 以心性尊攘之學 爲南土名儒 考諱敏植號一軒 才能承先啓後 妣順與安氏父泳鎭己亥四月二十六日擧公 自幼從父祖學 性穎悟識鮮俊敏才學夙成 纔未弱冠 絰傳百家 莫不淹貫稍壯爲人端整方正言辭簡黙行止雖筋整冠服 靜坐以時常溫知 手卷口誦以古人遠大自期 不安於小成 詩文如其人平遠灑落 而不自收拾曰 收此安用乎故 專致力於實行 居家事父母 每得歡心 於友于愛 不失敬 御家人以禮嚴不失和故一家之内 雍睦皆自得 紀綱井然 每朝率昆季四人來列侍堂上聽敎訓命然后退 夕人如之男女授受不相親 居廬奉祭祀 哀誠加於禮 接賓客與朋友交 盡忠敬自謙 然不妄交 亦無宿怨一觴一咏風流蕭灑 處世以方直 雖小少不近不義 不出八市井避世三遷處得其地 於是專心舊好 鉤深索微 學遂大進説書講義 横竪其説 言皆中理 嘗曰 心性自儒佛関 不可造次言辭間謂余曰 君頗翫世樂乎 世豈多翫 且男兒行吾正道而己 奚関世路崎嶇 且吾方尋吾所樂 而先後難定又奚暇翫世乎 可知其詣之日深矣嘉言善行 甚多然不甚緊於大軆故不及焉 所著詩文若干篇 丁酉十月二十二日卒纔五十九葬于楮田村負庚之原 後先兆也配幸州奇氏黙女 賢而無育先公卒 墓祔左以 弟之子寬容爲嗣 孫曰元翼亨奎 鳴呼人生果何處而來何處而去乎 古今都是一夢也己 公之嗣子寬容 謂余爲其 其先考之知己請其羨門之銘 其何忍辞諸銘曰 兩儀剝蝕 桑溟呑吐 二莫橫行 五常盡斁蟲沙攘荒凉世路膏車秣馬 範我馳驅 維有羊腸 奈我濶歩尋吾所樂 矢不失度皇天不吊道窮日暮一死千古逸士之墓 壬子月 日 唐城 洪瀾 謹撰 근와공휘동연묘갈명(槿窩公諱東璉墓碣銘) 공의 성은 조씨(趙氏)요 휘(諱)는 동련(東璉), 자(字)는 중기(仲器), 호(號)는 근와(槿窩)이시다. 옥천인(玉川人)으로 고려 광록대부(光祿大夫) 휘 장(璋)의 후손이다. 휘 원길(元吉)은 정책훈(定策勳)으로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지셨는데, 이분이 본관을 받은 할아버지이시다. 이분이 휘 유(瑜)를 낳았는데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고,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켜 조선이 개국하자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셨다. 휘 대성(大成)은 호가 매창(梅窓)인데 여절교위(勵節校尉)로 좌랑(佐郎)에 추증(追贈)되셨으며, 무곡사(武曲祠)와 곡수사(曲水祠)에 배향(配享)되셨다. 증조의 휘는 창관(昌灌), 할아버지의 휘는 장섭(章燮)으로 호는 위당(韋堂)인데 심성(心性)에 대한 이론과 중화(中華)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한 것으로 남쪽지방의 명유(名儒)가 되셨다. 아버지의 휘는 민식(敏植)으로 호가 일헌(一軒)인데 재능으로 선대를 계승하여 후손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다. 어머니는 순흥인(順興人) 영진(泳鎭)의 따님이시다. 기해년(一八九九) 四月 二十六日에 공을 낳으셨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아 배웠으며 성품이 영민하여 학문이 일찍 성취되어 약관(弱冠:二十세)이 되기 전에 경서(經書)와 백가(百家)의 글을 섭렵하지 않음이 없었다. 조금 더 자라서는 몸가짐이 단정하고 말이 간결하고 과묵(過黙)하였으며, 행실이 방정(方正)하였다. 의관을 정제하고 조용히 앉아서 배운것을 복습하여 외면서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항상 옛사람처럼 되기를 원대하게 기약하고 조금 성취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시문(詩文)은 그 사람처럼 평이(平易)하고 시원스러웠는데 모아두지 않으면서 이런 것을 어디에 쓰겠느냐고 하였다. 오로지 실행(實行)에 힘써서 집에서는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으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友爱)하면서도 경(敬)을 잃지 않았다. 예의로써 집사람들을 거느리면서 엄격하게 하였지만 그렇다고 화기(和氣)를 잃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가들이 화목하고 제대로 되어 기강(紀綱)이 정연하였다. 매일 아침이면 네 형제가 당위에 올라가 부모님의 교훈(敎訓)을 듣고서 물러 나왔으며 저녁에도 그처럼 하였다. 남녀사이에 물건을 주고 받을 때에는 친히 하지 못하게 하고 집에서 제사를 모실 때에는 애경(哀敬)을 예(禮)보다 더하여 정성스럽게 했으며, 손님이나 친구들과 교제하면서는 겸손하고 진심으로 대하면서도 함부로 사귀지 않고 또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으면서 즐기시니, 그 풍류(風流)가 운치있었다. 정직함으로써 처세하여 조금이라도 의(義)롭지 못한 물건은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저자에 드나들지 않으셨다.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세번이나 이사하여 마땅한 곳을 찾아 거기에서 옛날 좋아하던 학문을 연구하여 은미(隱微)한 뜻까지 탐구하여 학문이 크게 진보하였으며 경서를 설명하고 강의하면서는 아무렇게나 말하는 듯했지만 모두 이치에 맞았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심성(心性)에 대한 것은 유교(儒敎)와 불교(佛敎)가 서로 관련되어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다고 하였으며,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세상이 즐거운가. 세상에 어찌 즐거운 일이 많겠는가. 또 남아(男兒)로 태어났으니, 우리 유학(儒學)의 정도(正道)를 지키면 되지 세상이 험한 것이 무슨 상관인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바를 찾아 행하려고 하는데 그 선후(先後)를 정하기도 어려운데 어느 틈에 세상을 즐기겠는가? 하였으니 그 조예(造詣)가 깊음을 알 수 있겠다. 공의 아름다운 말과 행실이 아주 많았지만 대체(大體)에 관계되지 않기때문에 다 언급하지 않는다. 지은(詩文) 약간 편이 전한다. 정유년(一九五七) 十月 二十二日에 졸하시니 겨우 五十九세이셨다. 저전촌(楮田村)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지내니, 바로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다. 배위 행주기씨(幸州奇氏)는 묵(黙)의 따님인데 현숙(賢淑)하셨으나 자식을 두지 못하고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으며, 묘는 부좌(祔佐)이다. 동생의 아들 관용(寬容)을 양자로 삼았는데 손자는 원익(元翼)과 형규(亨奎)이다. 아, 인생은 과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예와 지금이 모두 한바탕 꿈이다. 공의 아들 관용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아버님의 지기(知己)이셨으니, 묘비명을 지어 주십시오 하는데 내가 어떻게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음양(陰陽)은 돌고 돌며 바다가 뽕나무 밭 되네 兩儀剝蝕 桑溟呑吐 오랑캐가 횡행하여 오륜이 모조리 떨어졌네 夷賊橫行 五常盡斁 사나운 무리들이 날뛰니 세상이 쓸쓸하네 蟲沙攘掠 荒凉世路 고거(膏車)가 꼴을 먹이어 우리나라를 달리네 膏車秣馬 範我馳驅 세상이 어지러운데 내 어찌 활보(闊歩)하라 縱有羊腸 奈我闊歩 하늘이 돌보지 않아서 도(道)는 궁하고 날 저무네 皇天不弔 道窮日暮 예로부터 한번은 죽게 마련 훌륭한 선비의 무덤이네 一死千古 逸士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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